17. 재호주대한체육회 킥복싱협회는 대한민국 정부 문화체육부 소관인 대한체육회가 승인한 정식 가맹단체 로서 호주에 소재한 킥복싱 체육관 및 종합격투기 체육관들, 그리고 유관 체육단체들을 회원단체로 영입하여 한국계 킥복싱 선수들을 발굴 훈련하여 대한민국의 제 체육제전에 국비로 참가한다.

 재호주대한체육회 킥복싱협회 KFKSCA (Kickboxing Federation of Korea Sports Council of Australia) 는 호주에 소재한 킥복싱 종합격투기 체육관 및 유관체육기관들을 회원단체로 영입 호주내 한국인 스포츠 제전에 이바지함은 물론, 한국계 킥복싱 선수들을 발굴 훈련하여 대한민국의 제 체육제전에 참가한다. 


제반 체육제전에 참가하기를 원하는 선수 및 선수가 소속된 체육관 또는 프로모션 기관들은 사전에 재호주대한체육회 킥복싱협회의 승인을 받아야 출전할수있다.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재호주대한체육회 킥복싱협회의 회원자격, 즉 개인회원 및 단체회원의 자격을 얻어야 한다.  회원자격을 취득한지 1년이 경과 되어야 경기참가 승인을 받을수 있다.
대한킥복싱협회. 대한체육회 정식 가맹단체 승인

[기사입력 2012년 12월 31일16시 21분 19초 ]






WAKO 킥복싱이 마침내 엘리트스포츠로 전환됐다.

대한체육회는 2011년 11월 18일 제 23차 이사회를 열어 대한킥복싱협회(WAKO KOREA)를 가맹 경기단체로 승인했다. 대한킥복싱협회의 정식적인 경기단체 합류는 지난 2009년 12월 대한체육회 인정단체로 승인 받은 이후 만 2년만의 일이다.


킥복싱이 대한체육회 가맹 종목으로 승인됨에 따라 대한킥복싱협회는 체육회로부터 예산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며, 전국체전 종목으로 채택될 수 있는 길도 열었다.


또 킥복싱 꿈나무들이 체육 특기자로, 중·고교는 물론 대학까지 진학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고 병역 특혜는 물론 실업팀 창단, 국제스포츠 무대에서의 입지 강화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의 킥복싱인구는 약 10만명으로 추산되며 대한킥복싱협회에 등록된 선수만 1,000명 이상이다.


대한킥복싱협회 공선택 사무총장은 "대한킥복싱협회는 그동안 킥복싱의 정체성을 넓히려 노력해왔다"며 "이번 대한체육회 가맹단체 진입은 엘리트 스포츠로서의 영역이 더 확대되는 것은 물론 킥복싱의 스포츠화에 급류를 탈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WAKO 킥복싱 국제연맹은 2006년 Sportaccord(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총회에서 정식가맹을 승인받고, 2007년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에 정가맹 승인을 받는 등 지금까지 IOC(국제올림픽평의회)가 승인하는 스포츠단체가 되기 위한 모든 준비과정을 마쳤다.


대한킥복싱협회는 매년 국가대표 선발전을 개최하며 스포츠어코드월드컴벳 게임 (Sports Accord World Combat Game), 실내무도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등의 국제대회에 선수들을 파견하는 등 지난2008년부터 지금까지 왕성한 활동을 벌여왔다.
[믿을 수 있는 격투기 뉴스, 신세기 격투스포츠의 길라잡이]
고준일 기자 (junil.ko@gmail.com)
기사등록 : 2012년 12월 31일16시 21분 19초


2013 전국 종합 킥복싱 선수권대회 및 인천실내무도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대회,
그 현장 속으로!

올 해 2013년 인천 실내&무도 아시아 경기대회의 한 종목인 킥복싱!  ‘2012 WAKO 아시아 킥복싱 선수권대회’에 참가한 한국 국가대표팀은 첫 출전한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값진 금메달 세 개를 획득하며, 한국 킥복싱의 위상을 드높이고 그 열기를 뜨겁게 했습니다. 그 열기에 이어, 2013 전국 종합 킥복싱 선수권대회 및 인천실내무도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이 1월 26일부터 27까지 양일간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에서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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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터치인 기자들도 그 뜨거웠던 현장속으로 다녀왔습니다! 경기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관중들이 함께해 주셨는데요. 킥복싱의 인기와 열기를 느낄 수 있었던 현장이였습니다!
전 국 종합 킥복싱 선수권 대회는 뮤지컬 폼, 포인트파인팅, 킥라이트, 풀컨덱, 로우킥, K-1, 무에타이의 각 7가지의 종목으로 나눠져 진행되었으며, 2013 인천 실내*무도 아시아 경기대회 국가대표 선발전에는 포인트파인팅, 풀컨텍, 로우킥 3가지 종목으로 치뤄졌습니다.
이번 2013 인천 실내무도 아시아경기대회 파견 국가대표 최종선발전으로, 풀컨텍 남(-57kg, -71kg) 여(-56kg), 로우킥 남(-63.5kg, -81kg) 여(-52kg), 포인트파인팅 남(-63kg, -74kg) 여(-55kg) 총 9명의 국가대표 선수가 선발되었습니다.

 2013 인천 실내&무도아시아경기대회 킥복싱 부문 국가대표! 눈부신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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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와 같이 총 9명의 선수가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습니다!  경기를 보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며, 승부를 종잡을 수 없었던 많은 경기들!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최종 선발전에서 1위와 더불어 국가대표가 되신 선수여러분 축하드립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포인트파인팅 -74kg급 김동아선수, 풀컨텍 -57kg급 김경철 선수, 로우킥 -63.5kg급 유현우 선수, 풀컨텍 -56kg급 강주희 선수, 포인트파인팅 -55kg급 박혜영 선수, 포인트파인팅 -63.5kg급 김준성 선수, 로우킥 -52kg급 김민경 선수, 풀컨텍 -71kg급 박동화 선수, 로우킥 -81kg급 안재영 선수
경기를 하실때의 그 치열한 모습과는 달리 싱글벙글 웃으시며 사진촬영에 임해주신 킥복싱 국가대표 9인방의 모습입니다!  다들 국가대표 다운 늠름함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킥복싱을 이끌어갈 주역들! 앞으로도 멋진 활약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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킥복싱 국가대표 9인방과 만남에 이어! 인천 실내무도 아시아 경기대회의 기대주! 3분을 만나보았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만나 보시죠!

여자 킥복싱의 새 역사를 쓸 포인트파인팅의 미소가 아름다운 박혜영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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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치인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박혜영 선수

터: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박혜영 선수: 서울 태웅에 있는 박혜영입니다. 세미컨텍(포인트파이팅) -55kg 출전했고요. 1,2.3차 최종까지 모두 1등했습니다.

터: 국가대표 선발되신 소감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박혜영 선수: 아직 이제 시작인 거 같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할 것 같아요.

터: 최종 목표가 있다면요?
박혜영 선수: 실내무도아시아게임 나가서 1등하고, 선수생활 오래하는 것이 목표예요.

터: 종목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릴게요.
박혜영 선수: 세미컨텍은 링 경기랑은 달리 기술을 많이 요하는 경기인 거 같고요, 머리를 많이 쓰는 경기인 것 같아요. 순발력도 빨라야되고요. 링 경기랑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와코 세계킥복싱챔피언쉽 2011'의 은메달리스트 킥복서 유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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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치인과 인터뷰를 하는 유현우 선수 모습, 오른쪽 시상식의 유현우 선수 모습

터: 자기소개 간단하게 부탁드릴게요.
유현우 선수: 2013 인천실내무도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최종선발전-63.5kg 로우킥 유현우라고
합니다.

터: 국가대표 선발되신 소감은요?
유현우선수: 우승하게 된 거에 대해서 엄청 기쁘게 생각하고, 여기가 마지막이 아니라 아시안게임에서도 우승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터: 우승하는데 누구의 공이 가장 컸다고 생각하시나요?
유현우 선수: 모든 분들의 공이 큰데 첫째는 가족이고 저희 체육관 관장님의 공도 컸다고 생각합니다.



킥복서로의 눈부신 활약이 기대되는 떠오르는 횃불! 박동화 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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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치인과의 인터뷰에 활짝 웃고 있는 박동화 선수 모습

 
터: 자기소개 간단하게 부탁드릴게요.
박동화 선수: 팀치빈에서 운동하고 있는 29살 박동화라고 합니다. 이번에 풀컨텍 -71kg 시합에
나와서 운이 좋게도 금메달을 땄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죠?

터: 실내무도아시안게임에서의 목표가 있다면요?

박동화 선수: 우승이죠 오로지. 금메달이죠. 좀 더 좋은 모습으로 좀 더 연습해서 확실하게 우승하겠습니다.

터: 킥복싱의 매력이 있다면요?

박동화 선수: 이거 하신 분들만 아시겠지만 한 번 빠져들면 못 빠져나와요. 여자보다 더 좋을 수도 있고, 마약보다 더 좋을 수도 있는 그런 운동입니다. 매력적인 스포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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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로우킥 -63.5kg  유현우 선수, 오른쪽 풀컨텍 -71kg 박동화 선수

2013 전국 종합 킥복싱 선수권대회 및 인천실내무도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대회의 생생한 현장과, 국가대표 9인방, 2013 인천 실내무도 아시안게임 기대주 3인방까지 만나보셨는데요! 어떠신가요~ 킥복싱이 조금 더 가까이 느껴지시나요? 킥복싱 경기를 보고 있으면, 그 열기에 함께 녹아들기도 하고, 스트레스가 확~ 풀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요! 그 생생한 현장에 다녀온 터치인 기자들은! 킥복싱의 매력에 녹아들고 말았답니다^*^ 앞으로 더 많은 분들이 킥복싱의 매력에 함께 녹아들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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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인천실내무도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선발되신 킥복싱 9인방 선수들*.* 그 늠름함과 열정이라면 어떤 상대도 무섭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킥복싱 대표로 우뚝 서신 국가대표 여러분들의 눈부신 활약에 많은 기대 가져도 좋으실 것 같습니다! 더불어 대한민국 킥복싱에 더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대한민국 킥복싱 파이팅!  2013 인천실내무도 아시안게임 킥복싱 국가대표 파이팅!


마사토 배출한 전일본킥복싱, 22년 역사 마감

[기사입력 2009년 08월 21일14시 43분 58초 ]






[전일본킥복싱연맹의 대표적인 스타였던 사토 요시히로와 마사토의 K-1 경기]


마사토, 사토 요시히로를 배출했던 전일본킥복싱연맹(이하 전일본)이 22년의 역사를 마감했다.

전일본킥복싱연맹 미야타 미츠루 대표 대행은 지난 20일 전일본킥복싱연맹의 해산을 공식 발표했다. 이로써 1987년 7월 첫 대회를 개최한 후 22년간 수많은 선수들을 배출한 전일본킥복싱연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전일본킥복싱연맹 해체의 발단은 지난 6월 22일 카네다 토시오 대표가 한국 여성과 위장 결혼을 한 혐의로 체포되면서다. 또한 그 배후에 야쿠자 간부가 있던 것이 드러나 당 연맹은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전일본에서 링 아나운서와 흥행부장을 겸임하던 미야타 미츠루가 대표 대행으로 단체를 운영하다 지난 20일 공식적으로 전일본킥복싱연맹의 해체를 발표했다.

전일본은 해체되지만 K-1 룰로 진행됐던 '크러쉬(Krush)'는 미야타가 최근 설립한 '주식회사 굿 루저(Good loser)'가 계속 이어간다. '굿 루저'는 전일본의 바통을 이어받아 향후 킥복싱 대회도 함께 진행할 예정이다.

전일본은 1987년 시작한 일본의 킥복싱 단체로 지난 22년간 마에다 켄사쿠, 마사토, 사토 요시히로, 코히루이마키 타이신 등 톱파이터를 배출한 일본 킥복싱의 산실이다. 뉴재팬킥복싱연맹, J-네트워크 등이 전일본에서 갈라져 나왔다.

한국 선수들 역시 전일본킥복싱연맹에서 다수 경기를 가졌다. 서울 청무체육관의 최영재 관장은 1989년부터 3년간 동단체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이후 이자형, 최영익, 임치빈, 최진선 등이 일본 챔피언들을 꺾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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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이타이와 킥복싱
1. 경기 형태
- 무에타이의 경기는 와이크루라는 의식을 치르고 경기에 임하게 됩니다, 그러나 킥복싱 경기에서는 복싱경기와 비슷하게 바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또한 무에타이경기는 팔꿉치기와 무릅치기가 자유롭게 사용이 가능하나 킥복싱 경기에서는 팔꿉치기를 금지하고 무릅치기가 자유롭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복싱과 킥을 더한겁니다. 


2. 기술적인 면
- 발차기 같은 경우 킥복싱은 태권도나 기타 한국에서 자생한 무술종목들의 발차기를 도입하여 한 것이기 때문에 수직형태나 직선형태의 발차기이나 무에타이의 발차기 기술은 수직, 직선형태도 있으며 대체적으로 원, 부채꼴 형태를 하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그 각도 가 다양합니다.
그리고 주먹으로 가자면 킥복싱은 복싱의 기술적인 면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면 무에타이는 주먹의 기술적인 면은 복싱과 같지만 짧게 치는 기술보다는 길게 치는 기술이 다르다고 볼수 있습니다.
팔굽치기 또한 팔굽치기의 형태는 무에타이의 고유의 기술로 무에타이 선수에게만 볼수있는 기술이기는 하나 요즘에는 팔굽치기까지 가르치는 킥복싱 체육관이 생겨서 여기서도 팔꿉치기 기술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선 킥복싱 기술은 팔굽부분만 움직이지만 무에타이는 각도와 공격하는 공격부의, 몸의 체중을 실어 친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기술적인 면은 무릎치기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킥복싱은 중앙 앞으로 치는 공격뿐입니다. 그러나 무에타이의 기술은 옆구리, 복부, 대퇴부, 안면등 기술이 다양합니다.
이 외에도 잡기, 방어기술이 다릅니다. <또 질문하시면 그떄 답변드릴께요>

3. 의식과 정신, 역사
- 무에타이는 경기직전 와이크루라는 의식을 행합니다. 이는 자기를 지도해준 스승, 부모, 형제 등에게 감사의 의미를 전달하며 경기에서 부정을 안하고 승리 등을 기원하는 깊은 의미의 정신적인 의식을 행하나 킥복싱은 그 자체가 없습니다.역사또한 무에타이는 태국의 전통무술로서 역사 깊습니다.. 


4. 외형적인 차이점
- 무에타이 선수들은 경기에 임하기 위해 머리에는 몽콘이라는 띠와 팔에는 프락샷이라는 띠를 착용하고 나오는 무에타이선수들만의 독특한 태국 전통적 정신이 깃들인 외형적인 모습이었으나 요즘들어서는 킥복싱선수들도 무에타이 선수들의 전통적인 정신 깃들여진 복장과는 달리 각 선수들간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기 때문에 사실상 분간하기 힘듭니다.

한국 킥복싱의 역사

2천6백 여 년 전(BC648) 고대 올림픽 종목으로, 복싱과 레슬링의 혼합 경기인 판그라션(PANKRATION)이란 운동이 킥복싱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로마의 궁전 경기장에서 사형수나 전쟁 포로들에게 결투를 시켜 승자에게 감형 또는 사면을 시켜주며 왕족들은 흥미로운 관전을 해 왔던 것이다. 경기 형태를 보면 손등에 철가죽을 감고, 죽을 때까지 혈투로서 처참한 경기를 하였다고 문헌에 전하여지고 있다.
킥복싱은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1964년 9월 당시 대한 태권도협회 오도관 본관장인 구판홍 선생님께서 제자들에게 태권도에 대한 지도보급 과정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강한 무술을 만들고자 태권도, 복싱, 유도, 레슬링 등의 특성을 종합적으로 절충하여 치고, 차고, 던지고, 꺾고, 조르는 종합 무술로 체계화하여 킹투기라는 무술을 독창적으로 창안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킹투기가 각종 무술 중에서 가장 과격한 최고의 격투 무술로써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그 이후 1968년 4월에 일본의 노구치오사무기꾸 킥복싱 회장이 킹투기의 발상지인 한국에 와서 구판홍 창시자와 최초의 회담을 가졌으며, 일본의 기꾸복싱과 한국의 킹투기를 킥복싱으로 명칭을 통일하기로 하고, 한일 간의 국제 교류를 합의하였다. 그로 인하여 킥복싱이라는 무술이 한국에서 최초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1968년 12월 12일에는 구판홍 회장 창시자가 문교부로부터 한국 킥복싱협회의 사회단체 등록(제29호) 승인을 받았으며 당시 동양방송국에서 킥복싱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태국 무아이타이 코치를 초청하여 한국대표선수 훈련을 받게 하였다 대표선수명단은 플라이급 김명수 반탐급 김광춘 라이트급 김정대 웰터급 이현방 미들급 류병호 헤비급 김광기 선수들이었다. 그 후 협회의 내분과 불협화음 때문에 해산시켜 버리고, 1970년 4월 13일 재차 협회의 사회단체 등록을 (제 31호) 받음으로써 명실상부한 국가공인 체육단체로 정식 발족하게 되었고, 전국 각처에 킥복싱 도장을 설치하였다.
사범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구판홍 창시원장을 최고의 지도자로 하여 서울(김정대, 강영복, 조향동), 강화(배성실), 청주(최병학), 대전(최창열), 대구(예영달), 부산(임천규, 김대훈, 구본근), 광주(김광춘, 이현방), 전주(김귀진, 김현식), 목포(구판봉) 사범 등이 최초로 킥복싱을 지도 보급하였던 것이다.
그 후 1969년 12월 26일 일본 원정을 위해 한국 킥복싱선수단을 결성하였는데 구판홍 협회장이 선수단장을 맡고 플라이급 김종현(전주) 반탐급 김광춘(광주) 페더급 박재혁(서울) 선수 등이 선발되어 일본 동경 구락구엔 경기장과 대판 부립 체육관에서 일본 선수들을 모조리 때려눕혀 KO로 전승함으로써 재일 동포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감격에 찬 눈물을 흘렸고 일본 국민들은 한국 선수들의 강인한 체력과 투지 그리고 묘기 백출하는 기법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구판홍 창시자께서는 킥복싱을 독창적으로 창안하여 제자들을 양성하고 협회를 결성 국가 공인 단체로 정식 발족함과 아울러서 6체급 챔피온을 탄생시켜 최초로 국제무대에 원정하여 일본 선수들을 매트 위에 쓰러트림으로써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며 통쾌 무비한 감을 느꼈다고 한다.
1977년 8월 30일은 태국의 방콕 안디라 호텔에서 거행된 동양 킥복싱 연맹 결성 총회에 한국 킥복싱협회의 회장으로서 구판홍 창시자가 참석하였고, 일본은 하기와라 회장, 태국은 룸피니스타디움의 차이디시아지트 회장이 참석하여 동양 연맹의 회장에는 태국의 차이 회장, 부회장에는 한국의 구판홍 회장과, 일본의 하기 와라 회장이 각각 선임됨으로서 킥복싱인들의 염원인 동양 킥복싱 연맹이 정식 출범하였고, 동양챔피온을 탄생시킬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다.
1977년 9월 17일에는 동양 킥복싱 연맹 창립기념 한국, 태국, 일본의 챔피온들이 대거 출전하는 국제 킥복싱 대회를 장충체육관에서 개최하였고  우리나라 킥복싱의 실력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1978년까지 수많은 국내 및 국제 경기를 주최하여 국민들로부터 각광을 받기 시작했으며 MBC TV와 KBS TV 중계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킥복싱은 날로 발전을 거듭하여 왔으나 킥복싱의 지도력 부족과 협회의 무능함으로 훌륭한 선수 발굴 육성에 활발하지 못하여 비통한 恨을 체육사에 남긴 채 1978년 말 문교부에 해체 신고를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이후 킥복싱의 문하생 또는 직간접적인 지도와 영향을 받은 자들이 각종(단체 이름만 다름)다양한 명칭을 붙이고 생명력이 죽은 채 철학도 없이 춘추 전국 시대를 방불케 여러 단체들이 할거하고 난무해 온 것이다.
이와 같이 난무하고 있는 여러 단체들이 행하고 있는 경기행태가 손에는 글러브를 끼우고 발로 차는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킥복싱을 그대로 유사하게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킥복싱인들의 염원인 동양챔피온 한번 탄생시켜 보지 못하고 오랫동안 침체 일로에 있었던 것이다.  
이 후 1988년 10월 20일 전국 각지의 킥복싱 원로 23명과 필자가 광주 건강회관에 모여 킥복싱 창시자인 구판홍 선생을 총재로 모시고, 초대 반탐급 챔피온이었던 당시 최고의 실력자 김광춘 원로를 연수 원장으로 추대하여 한국 킥복싱 총연맹이란 명칭으로 킥복싱의 발상지인 광주에서 다시 새 출발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1988년 12월 전국의 98개 체육관 관장과 킥복싱인 400여명이 한국 킥복싱 총연맹 창설에 대한 동의 안에 체결하고, 1989년 1월 7일 광주 한일회관에서 253명이 참석하여 한국 킥복싱 총연맹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그 후 1989년 2월부터 1991년 12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한국 킥복싱 총연맹 주관으로 국내 및 국제 경기를 17차례 개최하여 전국에 알리게 되었으면, 당시 대통령령 제 1055호에 의하여 단체업무가 체육부에서 전국 각 시도에 이관됨에 따라 1991년 12월 24일 한국 킥복싱 총연맹이란 명칭으로 당시 광주광역시에 사회단체 체육 제 1호로 등록하여 체육부에 보고 승인됨으로써 명실상부한 공인 체육 단체로써 1992년부터 2000년 초반까지 한국 킥복싱 총연맹의 킥복싱 원로들과 킥복싱인들이 합심하여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피나는 노력으로 100여 차례의 국내 및 국제 경기와 행사를 하며 킥복싱의 정통성과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 후 2005년부터 운영미숙으로 한국 킥복싱 총연맹은 사실상 해체   되버리고 명분만 유지한 체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2007년에 한국 킥복싱협회를 재건하여 문광부 제32조 규칙4조의 규정에 의하여 제 2007-1호로 재탄생시킨 것이다.